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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성장

부여 부소산성, 궁남지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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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인가? 부여를 찾았다.

주일오후 부여지점 마트근무를 나간 와이프도 볼겸 주일오후 예배 후에 부여로 고고~~~

4~50분을 달려 부여 도착~~ 부여를 몇번 다녀오니 이제 내비 없이도 대충은 알겠다.

와이프가 근무하는 마트위치를 대충 봐놓고 아이들과 근처 부소산성으로 갔다.

사실 큰녀석이 4살인가 5살때 한번 왔던 기억이 있다.

그이후 처음이다.

부소산성이 백제유적지라는것을 아이들에게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사실 나도 자세하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유명한 낙화함에 대한 이야기 정도만 말해주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

 

 

 

아래는 네이버에서 부소산성 검색을 해본 내용이다.


부소산성

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부여의 팔경이다. 이중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네 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들이니 부소산은 부여팔경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하겠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부여의 북쪽인 쌍북리(현: 관북리)에 있는 해발 100m쯤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 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사적 제5호이다.

부소산성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1957년에 처음 세워졌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5분 남짓 더 걸어가면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東臺)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이니만큼 아침 해뜨기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해 맞는 곳’으로 이름이 붙었겠다.

그 아래쪽으로는 군창터가 있어 너른 터에 철책을 둘러 놓았다. 백제 때에 군대 곡식창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 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초등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니 땅속에 묻힌 지 1,250년 만의 일이다.

군창터 옆에 움집 두 채가 있어 이채로운데, 이것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다. 1m가 채 못 되게 움을 파고 사방에 벽을 두른 뒤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가운데 화덕에서 나는 연기를 빼려고 환기창을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다. 바로 옆에 본래 움집터를 발굴한 곳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 놓고 볼 수 있게 했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자루(泗疵樓)가 있다. 한자가 ‘사비’(泗比)와 비슷하나 왜 사자루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백제 때에는 송월루(送月樓)가 있었으니 해맞이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지금 건물은 1919년에 당시 군수가 임천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뜯어다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바로 아래쪽으로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힘들지 않은 걸음이라도 땀이 났을 만한데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부소산성에 오르는 이들은 대개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실은 그 바로 아래 나무 모양의 난간을 두른 자리가 백마강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배경으로 더 근사하게 잡히는 곳이다.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다. 사비가 나당 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에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래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에 더 잘 보인다. 삼천 궁녀 전설로 해서 낙화암(落花巖)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원래 이름이 ‘타사암’(墮死巖)이니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다. 사실과 전설의 차이는 이런 이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끔찍한 역사도 세월의 더께는 그런 대로 옷을 입혀 준다.

조선 숙종때의 사람 석벽 홍춘경은 이곳에 와서 낙화암에 비추어 백제의 스러짐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읊조렸으니 오늘에 와서도 쓸쓸한 부소산성과 잘 어울린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 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 길 왼쪽에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한번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왕에게 이 약수물을 올릴 때 반드시 띄웠다는 고란초1)는 바위 틈새 어디엔가 숨어서라도 있을 법한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절벽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백제대교가 놓인 규암나루까지 갈 수 있는데 배를 타면 반드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하는 유명한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한번쯤 유행가 가락에 실려 보는 것도 좋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소산성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입구 매표소 지나서 출입문이다.

오르는 길이 돌로 잘 깔려져있다.

 

 

 

조금 오르다보면 우측으로 충렬사(?)가 있는데 오르는길 왼쪽으로 일반인이 사는 집처럼 보이는 주택이있다.

이런 유적지에 일반인주택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일반주택처럼 생겼다.

 오르는 길은 예전에 왔을때랑 조금 달라진게 있다.

요즘은 둘레길이 대세인지 어딜가나 둘레길이 있다.

부소산성에도 둘레길같은 등산로가 있다.

부소산성에 많은 오래된 소나무들이 참 좋다.

얼마쯤 올라가면 백마강이 뒷쪽으로 보인다.

낙화암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의 백제고기()에 따르면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백마강() 바위 위에서 투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가 백화정()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화암 [落花岩] (두산백과)

 

백화정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부여군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당시 궁녀 3천여 명이 이곳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백화정은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가 세운 것이다.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해 두었으며,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화무늬를 그려 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화정 [百花亭] (두산백과)

 낙화암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백마강은 참 전경이 좋다.

부소산성에는 참 다람쥐들이 많은것 같다.

오르는길에도 몇번이나 봤고 다람쥐들이 사람이 근처까지 가도 잘 도망가지 않는다.

해치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있는가?

백화정에서 고란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지만 다시 오르기 아이들이 힘들어할까봐 그냥 지나친다.

사실 내가 더 가기 싫었지만. ㅎㅎㅎ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싫다고 하기에 그냥 지나친다.

백화정을 가는길에는 예쁜꽃이 한창이다. 저꽃이 뭘까 한창을 궁금해 하는데

조금 가니 나무에 이름표가 붙어있다.

때죽나무란다.

열매를 찧어서 물에 풀면 물고기들이 때로 죽는단다. ㅎㅎㅎ

독성이 강한나무인가보다.

연리지라고 하는데 예전에 왔을때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보통 연리지는 두나무 가지가 붙어있는게 연리지 아닌가?

이것은 한나무에서 자란 가지둘이 하나로 합쳐졌다.

사자루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1824년(순조24)에 세운 임천면()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1919년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에 옮겨짓고 이름을 개산루()에서 사비루로 바꾸었다.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해강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196)이 발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자루 [泗(水+此)樓] (두산백과)

사자루 앞에 클로버가 많이 자라있다. 클로버꽃으로 아이들에게 꽃시계를 만들어줬다.

예전에 큰녀석 어릴적에 많이 만들어주곤 했었다.

남매의 꽃시계 찬 모습..

큰아이가 만들어준 아빠 꽃반지~~ 셋이서 크로스!!

궁남지를 들러볼까 했지만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밥먹고싶다고 하기에 그냥 입구에서 차를 돌린다.

날도 어두어 지고 다음 기회에~~

딸아이는 짬봉, 아들은 짜장밥이 먹고싶다기에 근처 중화요리집으로 고고~~

얼큰한 짬뽕과 아들녀석은 짜장면에 공기밥 추가해서 남기는 바람에 내가 다 먹느라 배가 터질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와이프 끝날시간에 맞춰서 마트로 갔더니.. 이런.. 직원들과 함게 오겠단다. ㅠ.ㅠ

다시 아이들과 집으로 고고~~ 올때는 더빨리~~ 피곤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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